logo

50년사

교회안내소개내용교회안내예배와 말씀목장사역과 양육교회학교미션교회소식


[기억나는 일들] 내가 본 안암교회

  • 김신종 집사
  • 조회 : 87
  • 2023.05.01 오후 01:07

                                                    내가 본 안암교회

 

                                                                                                                                                                                              김신종 집사

 

   지금 옛 일을 생각해보면 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간다. 초창기 안암교회에 있었던 몇가지 기억나는 일들을 회고해 볼까 한다.

  "나는 8.15해방 이듬해 월남하여 영등포에 살게 되어 영등포교회를 다녔다. 영등포교회는 지금도 큰 교회이지만, 그때만 해도 2층 대예배실이 있고 아래층에 소예배실이 있었고 교인수도 참 많았다. 뜰에는 미끄럼들과 시소, 그네도 있는 큰 교회였다. 이 교회를 다니다가 우리 식구는 남대문으로 이사하게 되어 남대문교회를 다녔다. 그 당시 남대문 교회는 세브란스병원 입구(지금 서울역앞 연세빌딩 자리)에 있었는데 교인이 많은 큰 교회였다.

그 후 우리 식구는 안암동으로 이사하여 안암교회를 다니게 되었는데 마침 공목사님은 이북외가댁이 다니시던 행영교회에서 시무하셨다하여 부모님들이 무척 반가와하셨다.

   나는 처음 안암교회에 갔을때 무척 의아했다. 교회라는 것이 사택 건물인데다 방을 터서 만들어 기둥이 많이있는 곳에 강대상만 덩그라니 놓여있고 교인 몇분이 방바닥에 주저앉아 예배를 보았다. 우리 집안은 식구들이 참 많았는데 명절때나 무슨날이면 큰집에 모여 할아버지가 주관하시는 예배를 드렸다. 찬송가를 부르고 돌아가면서 성경구절을 읽고 할아버지가 설교를 하시고 기도를 시작 하시면 나라와 교회, 교인으로부터 시작하여 첫째네 둘째네...일곱째네. 친척, 사돈, 이웃... 끝이 없이 계속되었다. 그 가정예배에 모이는 식구들이 60~70명이나 되었는데 교회가 우리 가정예배보다 규모가 적었으니 의아해 할 수 밖에 ..

   6.25사변이 일어나자 교회에 못 들어가게 교회문에 X자로 나무를 대고 못이 박혔고 우리 식구는 부산으로 피난하여 부산진 교회에 출석했다. 하루는 국군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를 비우라고 명령하였다. 목사님이 앞에나서 교회는 하나님의 성선이니 들어갈 수 없다고 거절하자 한 병사가 주먹으로 목사님의 얼굴을 구타하니 피가났다. 그런데도 목사님은 근엄하고 인자하게 웃으시며 교회는 절대 비울수가 없다고 더 정중하게 거절하니 그 병사가 "야 이새끼야 지금 전쟁중인데 교회면 다야! 너 죽어볼래!" 하고 총을 겨냥하여 쏘려고 하자 옆에 있던 장교가 병사를 말리면서 "목사님, 미안합니다." 하고 병력을 철수시켰다. 지금도 그 목사님의 존함은 모르지만 그 근엄하고 위엄있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는 그후 서울로 돌아와 다시 안암교회에 다녔다. 그 당시 우리집에는 대벽삼촌(김대벽장로), 규홍삼촌, 국성삼촌등 장정들이 많이 있었다. 어느날 대벽삼촌이 달려와 교회에 싸움이 벌어졌다고 알려왔다. 교회의 분열 때문이었는데 저쪽에서 깡패들을 동원한 모양이었다. 나는 삼촌들과 같이 달려갔는데 분위기가 참으로 험악했다. 그때 국성이 삼촌이란 분이 앞에 나서서 위압적인 말과 표정으로 완전히 상대를 제압해 수습이 되었다. 국성삼촌이란 분은 유도, 검도 유단자였는데 일본유학시절 유명한 '어깨' 였다고 한다. 국섬삼촌을 선친(김규찬장로)이 불러 너 때문에 교회일이 잘 수습되었다'고 칭찬하니 '형님께 처음으로 칭찬받는다고 웃으시던 생각이 난다. 그후 국성삼촌은 선친에게 끌려 교회를 다녔다. 교회를 갈때 윗주머니의 담배를 숨기는 것을 잊어 선친에게 자주 야단을 맞곤 하였다.

   그 후 교회를 짓기 시작했다. 전교인이 참여하여 참 열심으로 일을 했다. 교회 뒷쪽에서 진흙을 날랐고, 교회 앞쪽 하천 (개운사 쪽에서 내려오는 하천이 안암동로터리 부근에 있었음)쪽에서 모래를 퍼왔다. 운반수단이라야 당까(가마니에 양쪽으로 긴막대를 댄)와 가마니에 새끼줄을 묶어 끌어 오는 것이었고 여자들은 대야나 그릇에 흙을 담아 머리에 이고 날랐다. 진흙을 물에 깨서 발로 밟아 잘 반죽을 해서 네모난 나무틀에다 진흙 반죽을 넣어 뚜드려 흙벽돌을 찍어내어 햇볕에 말렸다. 나도 방과후면 들러 진흙을 밟거나 벽돌을 나르거나 가마니를 끌거나 하며 도왔다. 

   교회 건축이 한창일때 나에게 잊을 수 없는 분이 계셨다. 김승욱 장로님이라는 분이다. 교회 바로 뒷집에 살며 목수일을 하고 계셨다. 장로님은 착하고 매우 순박한 분이셨다. 교회 짓는 일을 진두지휘 하셨고 지붕 위에도 올라가서 손수 일을 하시면서 정말 너무 고생을 많이 하신 분이다. 김장로님이 교회를 지으신 후에는 교회 강대상과 의자들을 만드셨다. 긴 의자를 만드실 때는 목재소에서 나와 나무를 제재해와서 집주위에 널어 놓으시고 그냥 두면 나무가 휜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많고 무거운 나무들을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고 하셨다. 그 분의 아들(김력주)은 나와 같은 학교를 다녔는데 친하게 지낸지만 그 집에 자주 가서 나도 그 일을 거들곤 했다. 그렇게 만든 의자는 뒤틀리거나 휘지않고 참 견고하여 소예배실과 아브라함실에서 지금도 사용하고 다. 그 후 그 분은 선천(김규찬장로)과 오인섭 장로님과 같이 장로로 장립하셨다. 그 식구들 모두 너무 착한 분들이라 서울생활을 못하시고 생활이 어려워서 시골로 내려 가셨는데 참 고생을 많이 하셨다. 선친과 모친은 시골의 그 댁을 가끔 찾아가시곤 하셨다.

   교회 완공 후 교회에 큰 종탑이 세워졌다. 그 종소리는 안암동일대를 올렸고, 나는 그 종이 치고 싶어 예배시간 전에 교회에 가서 기다렸다가 예배시간 30분전을 알리는 종과 예배시간을 알리는 종을 치곤 했다

   성탄절이 되면 예수쟁이라고 놀리던 아이들 조차 교회를 기웃거리곤 했다. 성탄절때 새벽송 돌던 기억이 많이 나는데 새벽송을 돌때 우리 교회는 한광내(지휘자)선생님이 바이올린을 켜고 배재고 밴드부였던 공석준(연대교수)씨가 트럼본을 가져와 바이올린과 트럼본으로 반주하는 새벽송을 불렀는데 그 때 안암교회의 새벽송을 능가하는 교회가 드물었다. 그렇게 새벽송을 끝내면 어느 교인집에서 몸을 녹이며 떡국을 대접받곤 하였다.

   교회 지붕쪽 벽에는 '축 성탄' 이라고 크게 쓴 깜박등으로 치장했는데 안암동로터리 부근에서는 다 보였고 더구나 차례로 글씨가 점멸하는 크리스마스장식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 장치는 천정위에 있었는데 모터가 커다란 둥근판을 돌려서 글씨에 차례로 전기가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장치였다. 고석범집사(재미), 김창근, 최해섭장로님 등이 그 당시 그 장치를 만드느라, 또 고장이 잦아 고치느라고 추운 천정위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

   얼마후 조봉환 장로님 가족이 우리교회에 출석하셨다. 조장로님은 시골에서 장로로 계시다가 우리 교회에 협동장로로 오셨는데 그 모습과 근엄함이 나의 할아버지와 닮은 점이 많았다. 나의 할아버지는 이북에서 장로님으로 계시다가 월납하여 영등포교회 협동장로로 계시면서 교회 회계일을 보셨다. 현금을 집에 가져오시면 큰 주판으로 계산을 하시고 장부를 쓰셨는데, 먹을 갈아 붓으로 장부를 쓰셨다. 그럴 때는 문을 잠그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셨는데 나를 잘 보셨는지 나는 그 방에 들어가 먹을 갈아드리곤 하였다. 현금을 일일이 한장 한장 펴서 다리미로 다리시고는 방바닥에 골고루 펴놓고 그 위에 자리를 깔고 주무시고 아침 일찍 은행에 가서 저축하곤 하셨다.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과 조장로님이 비슷하게 보여서 나는 조장로님을 좋아하게 되었다. 조장로님이 기도를 하시면 "죽든 살든지, 살든지 죽든지" 라는 말씀을 전매특허처럼 하셨다. 교회 명절때나 유홍때 윷놀이를 하시면 아주 흥을 돋우시고 억지 때를 쓰시면서 교인들을 웃기시곤 하셨다. 가난하셨지만 선비다운 품위는 잃지 않으신 분이었다. 선친(김규찬장로)과 친해 그 댁에 심부름도 자주 가고 모친(김고분권사)도 김인숙권사님과 각별하게 친한 사이여서 나는 지금도 김권사님께 어머니 같은 모정을 느낀다. 또 쌍둥이 따님 (규선, 규영)들도 교회에 열심으로 봉사하였다.

   "내가 성화회 회장을 할때 이종수 장로님이 성화회 부장이셔서 이장로님댁을 방문하면 좋은 말씀을 해주시고 격려금도 주셨다. 사모님(박영희권사)도 우리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주셨다. 교회 마당에 탁구대가 있었다. 탁구를 치려면 순서를 기다리고 차례를 기다려 카운터를 불러주고 탁구를 쳤는데 지면 탈락이니 못치는 사람은 다시 치려면 많은 시간이 걸렸다.

   고교를 졸업하고 성가대를 하다가 말다가 했는데 어느해 성탄절이 다가오자 목사님이 설교에서까지 간곡하게 성가대를 봉사하라고 하셔서 다음주 친구들과 같이 성가대석에 앉았더니 지휘자(이름은 안밝힘)'어이 성탄절 친구들이 오셨구만하는 것이 아닌가. 내 친구들은 물론 그 후 나는 성가대석에 앉지 않았다. 사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KSCM (한국기독학생연합회)에서 합창단원으로 공연도 수차례 했고 졸업후 내가 합창단을 결성하기도 했다. 집사람(서영숙권사)도 그때 같이 활동했던 멤버였다. 본인은 아무 뜻없이 하는 한마디가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준다는 것을 느끼게하는 일이었다.

   두서없이 초창기 안암교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나열해 보았다. 나의 친구들 뿐만아니라 안암교회를 거쳐간 많은 분들을 지금은 볼 수가 없으니 안타깝다. 지난 50년을 뒤돌아 보고 다가올 50년을 기대하며 이 글을 마칠까 한다.




  • 번호
  • 제목
  • 등록일
  • 작성자
  • 조회
  • 1
  •  [기억나는 일들] 내가 본 안암교회
  • 2023-05-01
  • 김신종 집사
  • 88

게시글 확인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

게시글 삭제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

게시글 수정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