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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는 일들] 초창기 교인들에 대하여

  • 김정경 권사
  • 조회 : 87
  • 2023.04.25 오전 07:54

 

                                                                  초창기 교인들에 대하여 


                                                                                                                                                         김정경 권사


     1948년 가을 제기동으로 이사오면서 가까운 교회를 찾은 곳이 안암교회 였습니다. 개척한 1년도 되지 않은 교회는 일반 살림집의 벽을 헐고 만든 곳이라 중간 중간에 기둥이 있던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큰애를 등에 업고 교회에 나간 저는 믿음도 연약했고 교회사정도 몰랐지만, 주일만은 열심히 지켰습니다. 1949년 봄 둘째가 태어나서 교회 출석이 어렵게 되었답니다. 1950625일 그날도 주일이여서 작은애를 등에 업고 큰애의 손을 잡고 주일예배에 전과 다름없이 참석하고 돌아오는데 이상하게도 거리가 술렁거리고 라디오에서는 38선에서 접전이 있었다고 보도해도 6.25사변이 일어났음을 믿지 못했지요. 결국은 각기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고 수복 후에야 다시 교회를 찾게 되었답니다.


     이제 안암교회 50를 내는데 초대 교인 몇 분을 소개하라시는 청탁을 받고 기억나는 몇 분을 적어보려 합니다

     6.25 당시 교회 가까이 이오루할머니란 분이 교회를 지키시며 새벽기도를 매일 들이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분은 평안도 분으로 알고 있는데 이북에서 과수원을 가꾸실 때 나무에 눈을 다치셔서 한쪽 눈이 안 보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믿음이 좋으셔서 교회일열심이셨고 구수한 평안도 사투리로 꾸밈없는 진솔한 기도를 드리심으로 저희를 감동하게 하신 분이셨습니다. 며느님인 김실호 집사님(그 당시)은 홀로 되신 분인데 삯바느질을 해서 시어머님을 모시고 교회 봉사도 많이 하셨건만 예장으로 갈릴 때 교회를 떠나셨답니다

     교회 바로 옆에 살고 계셨던 전효애 권사님과 안순화 집사님 모녀분을 기억합니다. 전효애 권사님은 얌전하시고 용모도 단정하실 뿐더러 믿음도 돈독하셔서 매우 존경했던 분입니다. 항상 곱게 빗은 쪽 머리를 브라질로 이민 가시느라 자르시고 파마하실 때 아쉬워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비교적 생활이 넉넉하셨던 것 같았으며 교회에 종도 기증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따님만 다섯 분을 두셨는데 맏따님인 안순화 집사님과 함께 사시며 아들있는 사람을 한 번도 부러워한 적이 없었다고 하실 만큼 행복하게 지내신 분인 줄 압니다. 안 집사님은 성가대원으로 회계 집사님으로 수고하셨는데 그 당시 교인들의 생활이 어려워서 목사님 댁 생활비도 제대로 해결해 들이기도 힘들었다 합니다. 안 집사님도 부군의 사업실패로 하숙도 치시고 양을 길러서 자녀들이 양젖 배달도 하였는데 결국은 브라질로 이민을 떠나셨습니다

     이승실 사모님을 추모합니다. 맨손으로 남하하셔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을 내조하시며 사형제나 되는 자제분들의 뒷바라지하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옵니다. 솜씨 좋으신 사모님께서는 바느질도 잘하시고 음식도 잘 만드신 줄 압니다. 몸이 약하셨던 목사님을 위해 찬거리를 마련하시려 매일같이 안감내 시장엘 다니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힘드신 생활 속에서도 유머를 잊지 않으시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저희를 매료시키심은 깊은 믿음의 연고 인줄 압니다. 아무리 오래 이야기하셔도 지루함을 느끼지 않을 뿐 더러 기간 가는 줄을 몰라서 하루는 사모님과 제가 저녁을 해야 할 사람들인데도 해가 지는 것도 모르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분이셨는데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나신 것 너무나 애석합니다. 우리 공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 사모님이 돌아가시니 살이 찢기고 뼈가 으스러지는 느낌이셨다고 하셨으니 얼마나 마음 아파하셨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을 줄 압니다. 이 슬픔을 가슴에 안고 10여년 긴 세월을 홀로 지내시는 공 목사님께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인섭 장로님과 박경순 권사님 내외분, 박경실 권사님이 생각납니다. 박경순 권사님과 박경실 권사님 자매분은 과히 장부와 같은 믿음의 소유자였다고 생각합니다. 활달하신 성격은 진취적이고 적극적이어서 특히 박경실 권사님께서는 칠순이 넘도록 교회 봉사에 앞장서신 분이며 절대로 남의 말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으로 존경받으신 줄 압니다

     여흥 때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를 즐겨 부르신 씩씩하신 박경순 권사님께서 장흥리에 멀리 떠나 계실 때 문병을 가면 반가워 눈물 흘리시던 모습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노래 이야기가 나오니 이밀납 권사님이 떠오릅니다. 야외 예배 땐 언제나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를 부르셔서 우리를 즐겁게 해주신 권사님은 풍성한 몸매와 맞게 마음도 넉넉하신 분이셨지요. 우리 이봉림 권사님, 이정림 권사님, 김광명 권사님, 윤예신 권사님, 박영실 권사님, 이세례 권사님 모두가 저의 믿음의 선진인 동시에 마음의 벗들이셨답니다. 노인들을 좋아하는 저를 보고 제 아이들은 엄마 친구는 왜? 할머니들 이냐고 의아해 했지만 저는 권사님들을 몹시 좋아했고 권사님들도 저를 막둥이 집사라고 지극히 사랑해 주셨답니다

     이봉림 권사님과 이정림 권사님 자매분은 주님을 섬기시는 마음으로 목사님을 섬기신 분들입니다. 계절따라 나오는 햇과일이나 좋은 음식이 있으면 우선 목사님을 대접한 후에야 자신들이 드시는 것을 원칙으로 알고 계셨으니까요. 이봉림 권사님께서 저녁예배를 드리고 귀가하다가 저와 헤어지게 될 때 혼자 어떻게 가시느냐고 하면 주님이 함께 가시는데 왜? 혼자냐고 대답하심으로 그 확고한 믿음에 머리숙여지게 하셨답니다. 그렇게도 사랑하시던 안암교회를 다리가 불편하셔서 여러 해 동안 출석 못 하시다 부름 받으신 것이 안쓰럽습니다. 바로 이웃에 사시는 연고로 하루도 빠짐없이 저의 집을 방문하시고 어려운 일을 서로 의존하며 친어머니와 같으시던 김광명 권사님 외아드님인 오인호 선생님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도 당하셨지만 어머니의 기도가 이루어져서 오인호 선생님이 안암교회 집사님이 되신 것 생각하니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를 절대로 외면치 않으시고 들어주시는 우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인호 집사님 비록 늦게 주님 영접하셨지만 확고한 믿음으로 참 평화를 누리신 줄 압니다. 하루고 빠짐없이 기록한 성서말씀은 아름다운 유산으로 후손들에게 전해지리라 믿습니다. 김광명 권사님의 믿음의 승리인 줄 압니다

     윤예신 권사님 자그마한 체구에 얌전하시고 돈독한 믿음의 어머니 바느질 솜씨 좋으신 권사님은 우리들의 옷을 많이도 지어 입히셨지요. 외동 따님 박복순 권사는 어머니의 믿음을 이어받아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간다고 듣고 있는데 안암교회에 정착해서 어머니의 대를 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함은 저의 지나친 욕심일까요? 어느 곳에서나 주님 뜻 받들어 열심히 봉사함으로 축 복된 삶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거대한 체구의 소유자답게 마음도 넉넉한 박영실 권사님! 그의 굳은 믿음은 세상의 고난을 이기게 한 힘이 된 줄 압니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의 한 분인 아버지와 믿음이 독실한 권사님을 어머니로 두신 박영실 권사님은 모태신앙인으로서 전명여고를 졸업하신 재원(당시로서는)이었지만 겸손하고 소박한 그분은 누구나 친근함을 느끼며 사귈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부군의 사업이 여의치 않아서 조산원(산파)인 자신이 활동하셔서 가정경제를 도왔지만, 생활은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어려운 생활에도 불구하고 항상 명랑하며 누구에게나 신뢰감을 주는 좋은 분 이였습니. 저와는 가까운 이웃에 살면서 마음을 터놓고 통하는 믿음의 동지였습니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정의감, 비록 가난하지만 믿음 안에서 떳떳하게 살아감을 자랑하는 생활신조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인 줄 압니다. 어려운 이웃에게 자신의 힘으로 도울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팔 걷어붙이고 행함으로 예수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예를 들그 당시만 해도 초상이 나면 시신을 거두는 일이 매우 어려운 일이였는데 박 권사님서슴지 않고 이일을 자원해서 행하시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뒤늦게나마 성서대학에 나가서 공부를 하실 만큼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신 분이며 어린이 주일학교 교사, 여신도회 회장 등 교회를 위해서 많은 봉사를 하셨고, 권사회를 조직해서 많은 일 공헌하려 하셨는데 너무 일(향년 66) 하나님께서 부르심으로 뜻을 다 펴지 못하신 것 애석합니다. 돌아가시던 날 저녁 권사님의 친언니 되시는 정릉교회 권사님께서 꿈을 꾸셨는데 동생분이 흰옷의 입고 하늘로 올라가면서 언니 미안해 나 먼저 어머니께 가요하며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 꿈을 깨는 찰나 전화벨이 울리면서 부음이 전해오더랍니다. 너무나 생생해서 놀랐다는 말씀 전해 듣고 분명 주님 앞에 섰을 때 칭찬 받으셨으리라 믿습니다. 소식은 모르지만, 아드분 따님 두 분삼 남매믿음 안에서 복되게 살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초가을 청초한 코스모스를 연상케 하는 가냘픈 몸매와 성격의 소유자인 이세례 권사님은 겸손과 순종과 인내를 겸비한 지난날 이 땅의 어머니상을 대표할 이신 줄 압니다. 항상 자상하시고 인자하시며 부지런하셔서 남을 돕기를 즐겨하시던 이세례 권사님! 어려움을 당하셔도 믿음으로 극복하시던 모습을 회상하니 그리움이 더해옵니다. 여러 오라버니들 중 외동 따님에다 막내시라고 들었습니다. 권사님이 태어나시던 해에 부친께서 세례를 받으셨다고 이름을 세례라고 지으셨답니다. 아버지 장로님의 서랍을 독차지하시고 귀엽게 자라신 줄 압니다. 안암교회 조봉환 장로님(김인숙 권사님 부근)의 친 아우님이신 조은환 집사님께 시집오셔서 7남매의 자녀분을 두시고 남부럽지 않게 지내셨던 권사님께서 6.25사변 후 부군의 사업 실패로 서울로 오셔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신 줄 압니다. 셋째 아드님과 함께 사셨는데 자상하시고 부지런하신 권사님께서 며느님을 아끼시고 돌봐주심은 물론 손자들을 사랑으로 보살피심으로 평화롭게 지내셨습니다. 그러던 중 시험이 닥치느라 셋째 며느님이 여호와의 증인을 믿게 되어 갈등이 생겼고 권사님께서 눈물로 만류하셨지만 듣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집을 나오셨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안타까우셨겠습니까? 저의 집에 오시면 당신 집같이 마음이 편하시다던 권사님!! 지금은 평안한 하늘나라에서 영광 누리고 계시겠지요. 후손들이 어머니의 대를 이어 안암교회를 섬기기를 원하셨건만 한 분도 정착 못 함이 못내 아쉽습니다. 이분들 외에도 많은 믿음의 어버이들이 계셨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을 생각하며 그분들의 삶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고 열심히 봉사하며 전도하여 안암교회 발전을 위하여 헌신하기를 다짐합니다.

 

                                                                                                                                                          19978월  김정경 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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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억나는 일들] 초창기 교인들에 대하여
  • 2023-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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