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목회자칼럼

교회소식소개내용교회안내예배와 말씀목장사역과 양육교회학교미션교회소식


3.1 기미독립운동

  • 목회실
  • 조회 : 924
  • 2011.05.10 오전 08:48

31 기미독립운동

 

1919년 3월 1일 우리민족은 일본제국주의의 압박에 항거함과 동시에, 전 세계에 우리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총궐기하여 평화적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본은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강력한 무단정치를 펴는 한편, 민족고유문화의 말살, 경제적 침탈의 강화로 전체 조선민족의 생존에 심각한 위협을 가했다. 식민통치 10년 동안 모든 사회구성 계층의 정치, 사회의식이 급격히 높아져 갔고, 더욱이 미국대통령 윌슨이 전후처리를 위해 <14개조평화원칙>을 발표,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함에 따라 이 기회를 이용한 지식인종교인들의 주도로 항일민족운동은 삽시간에 거족적인 민족운동으로 번져나가게 되었다.

손병희를 대표로 하여, 천도교기독교불교의 지도적 인사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은 마침 고종황제의 인산因山(국장)이 3월 3일로 결정되자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모일 것을 예측, 3월 1일 정오를 기해 파고다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인쇄물을 뿌리고 시위운동을 펴기로 했다. 또 각 지방에도 미리 조직을 짜고 독립선언서와 함께 운동의 방법 날짜 등을 전달해 두었다. 손병희 이하 33명의 민족대표는 3월 1일 인사동의 태화관(泰和館)에 모여 한용운이 독립선언서의 낭독을 끝내자 만세삼창을 부른 후 경찰에 통고하여 자진 체포당했다. 한편 파고다 공원에는 5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후 시위에 나섰다. 이들의 시위행렬에 수만의 시민들이 가담함으로써 서울 시내는 흥분된 군중과 만세소리로 들끓게 되고, 만세운동은 삽시에 전국적으로 번져나가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와 시위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총독부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 비무장평화적 시위를 벌이는 군중에 대해 무자비한 공격을 가해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부상투옥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31운동 이후 전국을 휩쓴 시위운동 상황을 보면 집회수 1,532, 참가인원수 202만3,089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 1만 5,961명, 검거자 5만2,770명, 불탄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나 되었다.(일본측 발표) 이 거족적인 독립운동은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인해 비록 많은 희생자를 낸 채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대내외적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을 선명히 드러낸 바가 되어 우리 근대민족주의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 결과 대내적으로는 일제의 무단정치가 끝나고 보다 교활한 문화정치가 등장하게 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상해의 임시정부탄생, 해외 무장독립운동의 촉진, 그리고 아시아의 다른 식민지 및 반식민지의 민족운동 등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무저항운동인 제1차<사타그라하>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등 아시아 중동지역의 민족운동을 촉진시킨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 번호
  • 제목
  • 등록일
  • 작성자
  • 조회
  • 1
  •  3.1 기미독립운동
  • 2011-05-10
  • 목회실
  • 925

게시글 확인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

게시글 삭제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

게시글 수정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