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여수를 다녀와서 (1) .... 정유현 청년


여수를 다녀와서 (1)

정유현 청년

 

생각을 정리하며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낯선 곳을 찾던 중 여수가 눈에 들어왔다. 여수를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아름다운 여수 밤바다와 이순신 장군께서 지휘하시던 좌수영 본영, 유명한 돌산 갓김치도 있겠지만 주된 이유는 화려함 뒤에 숨은 한국사의 아픈 역사와 그 속에서 피어난 사랑 때문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는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모든 유적을 파괴하며 여수 사람들의 자존심을 짓밟고 풍부한 수산자원을 수탈했다. 해방이후에 여순사건으로 여수시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흙탕물에서 연꽃이 피듯이 가장 암울한 시기에 가장 소외받던 곳에서 세상을 놀라게 한 사랑이 피어났다. 바로 손양원 목사와 애양원의 이야기이다.

 

손양원 목사의 삶을 짧게 소개하고 싶다. 손양원 목사는 19026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에서 출생했다. 7세에 부친 손종일 장로와 함께 입교를 했다. 어려서부터 신앙심이 깊었다. 보통학교 시절에 동방요배를 우상숭배라고 하여 하지 않아 우여곡절 끝에 1919년에 졸업했다. 서울 중등학교에 진학하여 만두 장사를 하며 고학을 하다 부친 손종일 장로가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실형을 받으며 학업을 중단하고 낙향했다. 일본 유학 중 일본 판교 성결교회 나카다 목사의 설교에 영향을 받아 귀국 후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경남 성경 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부산 감만동 나환자 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이것이 한센환자들과 첫 인연이었다. 노방 전도를 위해 사임했다. 손양원 목사가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신학교의 신사참배 반대로 인해 손양원 목사 기수를 마지막으로 학교가 폐쇄되었다.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었지만 손목사의 신사참배 반대 신념 때문에 방해를 받아 안수를 받을 수 없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 중 1939년 여수 애양원 교회에서 부임했다. 이곳에서 많은 한센환자들을 돌보며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이어가다 1940년 수감되어 해방 될 때까지 6년간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도 전도에 힘써 간수들과 수감자들에게 예수를 전했다.

1946년 목사 안수를 받고 애양원 교회를 섬기던 중 1948년 여순사건이 일어나 두 아들 동인, 동신을 한 번에 잃었다. 두 아들의 장례식에서 아홉 가지 감사 제목을 발표하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감사 제목 중에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양자로 삼아 하나님의 일꾼으로 만들겠다는 것도 있었다. 마음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인민군이 무서운 기세로 남하하였다. 손양원 목사의 주변 인물들은 피난 갈 것을 권했지만 손목사는 교회에 끝까지 남아 한센환자를 돌보아야 한다며 피난 갈 것을 사양하고 애양원 교회를 지키다가 1950928일 여수 미평에서 순교했다.

(계속)




  • 번호
  • 제목
  • 등록일
  • 작성자
  • 조회
  • 1
  •  여수를 다녀와서 (1) .... 정유현 청년
  • 2018-04-01
  • 관리자
  • 1170

게시글 확인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

게시글 삭제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

게시글 수정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