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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 박정일 목사
  • 조회 : 556
  • 2019.11.29 오전 08:47

가을날

 

 

가을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억만금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시원한 공기에 행복과 감사가 밀려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Herbsttag)이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주여, 가을이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놓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풀어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숙케 하여

마지막 단맛이 진한 포도주 속에 스며들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에도 오래 고독하게 살면서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레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릴케시집2014, 문예출판사)

 

아름다운 시입니다. 이 시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이틀만입니다. 릴케가 <‘며칠만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라고 썼거나 <‘한동안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라고 썼다면 저는 이 시를 지금처럼 좋아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릴케가 선택한 이틀만이라는 시어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상의 시간을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막연한 시간을 주시는 게 아닙니다. 하루하루의 생활을 주십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밥을 먹고, 다른 사람과 만나며, 고민하고, 기도하는 일상의 하루하루가 곧 삶입니다.

 

또한 이틀만이라는 시어는 가을의 햇살이 유한하리라는 걸 예고합니다. 곧 겨울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비치는 가을 햇살, 지금 스치는 가을의 공기가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네 맞습니다. 겨울이 올 겁니다. 릴케는 고독한 사람은 잠을 자지 않고, 읽고, 긴 편지를 쓸 거라고 합니다. 겨울바람에 나뭇잎이 날리고 외로운 이는 가로수 길을 헤맬 거라고 합니다. 겨울의 날들이 인생을 고독과 쓸쓸함으로 내몰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로 편지를 쓸 것입니다. 가로수 길을 지나 예배드리러 모일 것입니다. 서로를 돌아보며 따뜻한 겨울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입니다.

박정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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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을날
  • 2019-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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