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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 국치일

  • 목회실
  • 조회 : 887
  • 2009.08.30 오후 11:46

 

경술 국치일


  8월 29일은 1910년 8월 29일 일본에게 나라를 강탈당한 지 99주년 되는 국치일(國恥日)이었습니다.  그날을 우리는 ‘나라가 부끄러운 날’로 기억하고자 국치일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8월 29일을 국치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대부분 사람들에게 8월 29일은 낯설기만 합니다.

  1910년 8월 29일 아침은 평온하기만 했습니다.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은 1주일 전인 8월 22일 비밀리에 체결되었고 이 날은 대내외에 그 비보를 공포하는 날이었습니다.  거리에는 경찰과 헌병이 깔렸고 기마대는 쉴 새 없이 순찰을 돌았습니다.  마침내 남산 밑에 자리한 통감부에 군복차림의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이완용 등 대한제국 대신들을 거느리고 나타나 행복증진과 동양평화를 약속하며 조약을 정식 발표했습니다.

  ‘제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 또는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로 시작되는 8개항의 조약은 순종황제 서명 없이 공포됐고,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왕조가 사라졌건만, 자결로 항의하는 황족은 없었습니다.  그와 달리 존경받던 선비 황현은 벼슬을 하지 않아 나라의 녹을 먹은 적이 없었음에도 500년 동안 선비를 길러준 나라에서 망국을 구경만 할 수 없다면서 자결했습니다.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씨 부친인 홍범식도 그날로 소나무에 목을 맸습니다.

  국내는 물론 중국, 러시아, 미국 등 한국인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지 이 날을 기념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건국기념일, 3.1 기념일, 8.29 국치기념일을 3대 기념일로 제정했습니다.

  국내에서는 물론 합법적인 기념식이 불가능했지만 <독립신문> 1919년 9월 9일자는 “29일에는 각 상점이 일제히 철시하되 마치 예약한 듯하고, 잡상인이라도 문을 연 자가 전무하며, 외국인도 문을 열지 않았다.  오전 10시경에 북악산에 큰 태극기를 달고 만세를 불렀다. ....남대문, 종로통에 인산인해를 이루며 왕래하는 사람들은 소곤소곤 귓속말을 할 뿐이었다. ...”고 전합니다.

  이렇게 매년 국치일만 되면 ‘국치기념일을 잊지 말자’는 격문 살포나 낙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형무소 정치범들이 국치일 단식동맹을 하거나 노동자들이 국치일을 총파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미국에 살고 있던 한인들은 당장 국치기념일부터 폐지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해방은 됐으나 아직 독립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엔 공식적인 기념식이 개최되지 않았으나, 달력에서는 국치일이 기념일로 온존했습니다.  8월 29일을 맞이해 국치를 기념하는 대신 순국선열을 추도하는 행사가 중앙청에서 열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일협정 이후에는 국치일이 달력에서도 슬그머니 사라져갔습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드시 반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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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술 국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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